혼돈의 시대, 한국의 지성 12인에게 길을 묻는다. <시사IN>은 우리 시대의 대표적 지성을 모시는 2009년 신년 특강을 준비했다. 박원순, 우석훈, 정혜신, 김어준 등 스타 필진 12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생태, 경제, 공동체, 사회, 역사, 심리 등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분들을 모시고, 갈팡질팡하는 혼란의 시기에 희망의 단초를 찾고자 했다.
주 강연자와 보조 강연자를 함께 모셔, 주 강연자가 강연을 하고, 보조 강연자가 전체 내용을 정리하고 주 강연자에게 질문을 던지는 방식이었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이 이문재 시인과, 정혜신 정신과 전문의가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와, 김수행 교수가 정태인 경제 평론가와, 조한혜정 교수가 우석훈 박사와, 박원순 변호사가 시민운동가 하승창씨와, 서중석 교수가 정해구 교수와 각각 짝을 맺어 강연을 했다. 이 책은 그 <시사IN> 신년 특강을 한데 묶은 것이다.
시사주간지 <시사IN>이 이 책을 기획한 것은 지난해 말이었다. ‘서브 프라임 모기지’라는 익숙지 않은 미국 부동산 금융 위기에서 시작한 경제 위기가 한국에도 본격적으로 밀어닥쳤을 때였다. 또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한반도 대운하라는 망령은 ‘녹색 성장’이라는 해괴한 탈을 쓰고 등장했다. 747 공약은 출발부터 ‘부도 수표’로 전락했다.
그 시기에 <시사IN>은 우리 시대의 대표적 지성을 모시는 2009년 신년 특강을 준비했다. 생태, 경제, 공동체, 사회, 역사, 심리 등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분들을 모시고, 갈팡질팡하는 혼란의 시기에 희망의 단초를 찾고자 했다. 주 강연자와 보조 강연자를 함께 모셔, 주 강연자가 강연을 하고, 보조 강연자가 전체 내용을 정리하고 주 강연자에게 질문을 던지는 방식이었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이 이문재 시인과, 정혜신 정신과 전문의가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와, 김수행 교수가 정태인 경제 평론가와, 조한혜정 교수가 우석훈 박사와, 박원순 변호사가 시민운동가 하승창씨와, 서중석 교수가 정해구 교수와 각각 짝을 맺어 강연을 했다.
올해 초, ‘혼돈의 시대, 위기 속에서 길을 묻다’라는 제목으로 신년 강좌를 준비할 때는 150석에 가까운 좌석을 모두 채울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가뜩이나 먹고살기도 빠듯한데 누가 일부러 골치 아픈 공부를 하러 오겠느냐는 생각에서였다. 게다가 유료 강연이라니. 하지만 기우였다. 여섯 번에 걸친 연속 강연은 모두 대성황을 이루었다. 청중들로부터 질의가 쏟아져 매번 강의실 대관 시간을 연장해야 했다. 출판계에서도 이 강연에 주목했다. 열 군데에 가까운 출판사에서 이 특강 내용을 묶어 단행본으로 펴내고 싶다고 연락해왔다.
이 책은 그 <시사IN> 신년 특강을 한데 묶은 것이다. 많은 분들이 뜨겁게 호응을 해주신 데 힘입어 <시사IN북>은 첫 번째 세상에 내놓을 단행본으로 이 강연록을 택했다. 강연 내용은 물론이고, 질의 응답도 될 수 있는 한 현장감 있고 꼼꼼하게 살려보려고 노력했다. 열두 분의 필자들은 초고를 보고, 새로운 내용을 대폭 수정·보완했다.
우리 사회 각 분야 열두 분의 지성에 따르면, 현실은 암울하다. 한국 사회는 어처구니없게도 ‘다시 감옥을 가는 시대’로 역진했다(박원순 변호사). 사회 전체가 점점 비정하고 비열해지고, 일은 열심히 해도 끝이 없으며, 옳다 그르다에 집착하는 사람은 모자란 사람 취급당하는 세상이 돼버렸다(조한혜정 교수). 13세 소녀가 심야에 입시학원을 전전하면서 졸지 않으려고 커피 중독에 걸리는 나라(우석훈 박사)가 됐으며, 국민우울증·국민 불안 시대를 맞았다(정혜신 신경정신과 전문의). 용산 참사처럼 같은 날 벌어진 똑같은 사건을 어떤 신문은 엄청나게 크게 싣고 어떤 신문은 거의 무시해버리는, 흡사 해방 직후와 같은 극단의 분열 상태로 치닫는다(서중석 교수). 돈이 없어서, 직장에서 해고되어서가 아니라 인간관계라는 인간살이의 근본 토대가 망가져 큰 탈이 나버렸다(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하지만 열두 분의 지성은 여기에서 희망을 발견한다. 정혜신 선생은 ‘나만 힘든 게 아니었구나,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하는 깨달음이 사람을 치유한다고 말한다. 문제는 경제 회복이 아니라 자기 회복이라는 걸 자각하라고 권한다. 박원순 변호사에 따르면 희망은 보고자 하는 사람 눈에만 보인다. 깨어 있는 사람이 뭉치면 그 시대와 역사를 얼마든지 바꿀 수 있으며, 창의성과 차별성이 어떤 고난도 극복할 무기임을 기억해야 한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생각에는 경제 성장이 멈춘 것은 걱정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춤추고 좋아해야 할 일이다. 이번 기회에 긴 불황기에 일본의 샐러리맨이 그랬듯이 꽃을 구경하고 황혼을 오랜 동안 바라보면서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가치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조한혜정 교수는 이명박 정부를 5년 정도에서 잘 끝내고, 보다 소통할 줄 알고, 우정과 환대라는 감각을 가진 정권을 원한다면 우리 자신의 언어와 몸부터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우석훈 박사도 우정과 환대뿐만 아니라 명랑까지도 보수와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1948년의 친일 경찰 득세, 유신 치하, 신군부의 언론과 인권 말살 등 우리 역사의 고비고비마다 역주행이 있었지만, 그리고 지금도 ‘건국절 논란’처럼 역사를 되돌리려는 시도가 있지만, 우리 국민은 항상 그것을 선거로 바로잡곤 했다는 서중석 교수의 글도 마음 한구석 든든하게 만든다. 한국의 지성 12인의 글은 하나로 통한다. 거꾸로, 희망이다.
“녹색이라는 말은 성장이라는 말과 결합할 수 없다. 성장하지 말자, 성장 경제를 그만두어야 한다는 목소리를 <녹색평론>은 17년 동안 계속 내왔다. 경제 위기가 우울하고 빨리 극복해야 할 사태라고 생각하지 말자. 우리 경제가, 자본주의 경제가 흥청망청 계속 갔다면 어떻게 할 뻔했는가? 만일 자원과 에너지를 무진장 분별없이 탕진하는 경제가 10년, 20년 계속 허용됐다면 어찌되었을까? 전멸이다. 이 기회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은 삶은 관조적인 삶’이라고 했다. 좋은 삶이란 좋은 삶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삶이다. 함부로 무턱대고 사는 게 아니라 좋은 삶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생각하면서 사는 거다.
요즘 우리가 당황하고 죽는 소리를 내는 것은 공동체가 없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뒷받침이 없다면 아무리 물자가 풍부하고 수입이 많아도 항상 불안하다. 서양의 자유주의는 원자화된 개인을 근본으로 생각하는 철학이고, 그 생각으로 우리가 근대를 살아왔다. 하지만 그래서는 항상 불안하고, 고독하다.
인간관계를 사회 자본이라고 부른다. 수십 년간의 고도성장논리가 사회적 자본, 인생살이의 근본이 되는 것을 망가트리고 있다. <녹색평론>이 되풀이하는 메시지는 ‘협동, 협동조합’이다. 자율적 상부상조의 협동체를 스스로 만들어서, 될 수 있으면 기존 주류의 자본과 국가의 논리 바깥에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기를 수밖에 없다. 간디는 70만 개 마을이 각자 공화국이 되자고 했다. 내가 보기에, 간디는 근세기 최고의 정치 사상가이다. 생태적으로 파국을 막고, 개인이 행복하고, 민주적 주체로 살려면, 이런 요구를 한꺼번에 충족하려면 무수히 많은 협동체를 만들어야 한다.”
“지금껏 상담한 이들의 차트를 정리했더니 1만명 가깝더라. 그들이 자기 이야기를 다 털어놓은 뒤 가장 궁금해하는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게 뭐냐 하면 ‘나 같은 사람 또 있나요?’다. 정신과에서 상담을 할 때, 그룹 상당의 가장 보편적인 치유 효과가 뭐냐 하면 ‘아하,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사람이란 존재는 남의 것을 앎으로써 어떤 일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고 거기서 심리적 안정감을 얻을 때가 많다.
사람은 있는 그대로 자기 존재를 인정받고 싶은 강력한 욕구가 있다. 그래서 사람이 진짜 자기 존재를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원하는 바가 뭔지 분명히 아는 것, 그것이 ‘자아 회복’이다. 그런데 사람이 자기에게 다가가는데, 아주 큰 걸림돌이 첫 번째가 돈, 두 번째가 지식이나 학벌이다. 우리 안에서 은연중에 굉장히 어리석은 도식이 작동하게 되는데 이것을 정신분석학에서는 ‘마술적 사고’(magical thinking)라 한다. 원시인이 홍수 같은 자연 재앙을 이기기 위해 마을 처녀를 제물로 바치면서 ‘내년엔 이런 재앙이 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믿는 것이 그 예다. 예측 불가능한 공포와 불안을 처리하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낸 어떤 사고 체계가 바로 ‘마술적 사고’다. 돈이나 학벌 같은 것 역시 불안감을 달래기 위해서 만든 마술적 사고 같은 것이다. 이것은 자기 존재에게 다가가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다. 그래서 우리가 공부를 하거나 학원을 다니는 게 어쩌면 내 불안을 회피할 목적이 아닌지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나는 우선 ‘다 멈추자’는 이야기를 드리고 싶다. 있는 그대로 내 불안을 한번 바라보자. 정말 뭐가 얼마나 불안한지, 일단 직면해야 한다. 그 과정 없이는 본질에 다가갈 수 없다.
아우슈비츠 수용자들을 다룬 어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일주일에 한 병씩 지급되는-마시기도 매우 부족한-생수의 반을 남겨서 그것으로 얼굴을 닦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생존율이 훨씬 높았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다. 그런 극단의 상황에서도 자기 존재를 의식하고 배려하는 이들의 생명력이 더 강하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공황은 왜 발생하는 것일까? 자본가들은 이윤을 높이기 위해 기술을 도입해 생산량을 늘리거나 또 노동자들의 임금을 삭감하고 비정규직을 늘리는 방식을 취한다. 그러면 생산은 늘지만 정작 물건 살 사람이 없어서 수요는 줄어들고 이는 다시 기업과 은행의 도산으로 이어지는 모순이 발생한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과잉생산, 과잉 축적으로 발생하는 공황은 필연이다.
1974~1975년 공황을 보자. 주류경제학에서는 석유수출기구(OPEC)가 탐욕스럽게 석유 가격을 올려 공황이 왔다고 말하지만 이는 방아쇠를 당긴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 경제는 이미 1970 ~1971년 경기 후퇴 국면에 들어가 있었다. 정부는 돈을 풀었지만 생산 부문에 투자되지 않고 원자재·곡물 투기에 쓰였다. OPEC이 석유 가격을 4배로 올린 것도 그런 경향에 편승한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물가상승이 심해지고 정부는 다시 긴축정책을 펴야 했다. 시중에 돈이 말라버리니 상품이 팔리지 않고 이는 기업과 은행들에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1997년 외환 위기 사태도 마찬가지다. 주류경제학에서는 연고자본주의나 도덕적 해이가 원인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자본주의 경제에 내재하는 정상적인 공황으로 본다. 1990년대 중반 한국의 대기업은 후진국형 노동집약 산업과 선진국형 기술집약 산업 사이에서 투자의 진로를 어디로 잡을지 고민에 빠졌다. 그래서 돌파구를 전자·석유·조선·자동차에서 찾고 외자를 차입해 엄청나게 투자했다. 1996년쯤 되어 수출을 시작하려 하니까 세계 시장은 이미 위축됐고, 생산은 과잉이었다. 그래서 1997년 1월 한보철강이 망했고, 6월에 기아자동차가 망했다. 기업에 대출해준 은행도 망했다. IMF가 한국에 570억 달러를 꿔줬는데 당시 우리뿐만 아니라 인도네시아·타이완·홍콩·중국에도 미국 자본이 많이 들어갔다. 그 돈이 IT산업에 집중 투자됐고 다시 과잉생산이 되어 위기가 찾아온다. 그게 1999∼2000년의 IT 버블이다. 다시 미국은 기업과 은행을 살린다고 돈을 쏟아부었는데 이번에는 그 돈이 주택 부문으로 갔다. 주택을 사고파는 사람에게 돈을 많이 꿔주니까 주택 가격은 치솟았고, 비우량 차입자에게도 마구 대출되었다. 설사 대출금을 갚지 못한다 하더라도 담보로 맡겨진 주택을 팔면 원금 회수가 가능하다고 금융기관은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상누각이었다. 주택 가격이 떨어지자 주택을 담보로 한 채권도 휴지가 되었다.
지난해 가을 미국 정부가 금융권에 구제금융 7000억 달러를 쏟아부었지만 돈이 돌지 않았다. 은행 자체의 빚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사실 미국 금융기관들은 다음 조처를 기대한다. 자신들의 부실 채권을 정부가 사주길 바라는 것이다. 중소기업, 자영업자 등 내수 시장을 살려야 한다. 사회보장제도를 확대하면 된다. 교육·의료 부문에 투자하는 돈은 결국 내수 시장을 활성화하는 데 쓰인다.”
“상상력에 대해 내 이야기를 하자면, 나는 공부하거나 글을 쓸 때 자주 처지를 바꿔 생각해본다. 아내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거나 혹은 (아직 아기는 없지만) 딸의 처지에서 상상해본다. 예전에 지율 스님의 투쟁을 보면서는 도롱뇽이 되는 상상도 해봤다. 사람들은 이런 상상을 잘 못하는 것 같다. 그 이유가 겁에 질려 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최근에 만난 일본인과 한국인을 비교해보면 평균적으로 한국인이 훨씬 겁에 질려 있다.” – 우석훈
“겁이 없으면 판을 읽을 수가 있다. 관찰력도 겁이 없어야 생긴다. 도룡뇽이 되려 해도 관찰을 해야 한다. 어릴 때부터 자기를 이탈해서 관찰하는 것, 이게 바로 겁에 질리지 않는 여유 아닐까.
여성운동 하면서 ‘여성운동이 그동안 너무 적대와 경쟁의 논리로만 움직였구나’ 하고 많이 느꼈다. 남자들을 많이 괴롭히고 놀라게 했다. 성매매자 명단 공개, 성희롱 캠퍼스 재판 같은 것이 그렇다. 초반엔 정의를 바로잡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 좋았는데 ‘그 과정에서 좀 더 우정과 환대라는 게 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우정과 환대가 거창한 게 아닌데 말이다.
일본에 굶어죽는 사람이 많다. 실제로 찾아가면 죽을 만큼 가난하지는 않다. 굳이 살고 싶지 않은 것 아닐까. 그런 현상을 보며 어떤 식으로든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혼자’가 아닌 ‘같이’가 중요하다. 유럽 사회는 애완견과 함께 살거나 혼자서 사는 게 익숙하다. 우리나라에선 혼자 잘살면 병리적으로 본다. 나는 그게 바로 희망이라 생각한다. 혼자 사는 걸 정상으로 보지 않고 좋든 싫든 같이, 함께 존재하는 게 중요하다. 그런 베이스를 만드는 게 농사다. 요즘 성미산학교처럼 도시와 농촌이란 이분법을 깨뜨리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 조한혜정
“2006년 다보스 포럼에서 가장 주목받은 이들은 누구일까? 바로 사회적 기업가들이다. 어떤 사람은 사회적 기업이 ‘사회주의’ 기업이냐고 묻기도 하더라. 사회적 기업은 자선이라는 가치를 기업적 방식으로 실현하는 회사인데, 바로 아름다운재단이 대표적인 사회적 기업이다. 영국에서는 사회적 기업이 무려 5만5000개 활약하고 있는데, 이들 기업은 전체 일자리의 5%를 차지하고 있다. 사회적 기업의 한 해 매출액이 50조원에 달해 국내총생산액(GDP)의 1%를 차지하고 있다. 영국 정부는 사회적 기업의 효용에 눈을 떠 지난 2006년부터 적극 지원하고 있다.
사회적 기업이라는 취지는 좋은데, 약육강식의 룰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과연 버텨낼 재간이 있을까? 어디든 틈새는 있기 마련이다. 틈새는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우리 발아래 있다. 틈새가 저절로 보이는 건 아니다. 역발상을 해야 한다. 예를 들어 러그마크 인증제처럼. 네팔·인도·파키스탄 지역에서 생산하는 카펫이나 축구공은 대표적 제3세계 아동 착취 제품이다. 하지만 러그마크를 새긴 카펫은 ‘아동의 노동으로 만들지 않았다(No Child Labor)’는 뜻을 담고 있다. 나아가 러그마크 회원사는 일부 수익금을 이 지역의 아동 교육이나 복지에 쓰고 있다. 최근 이 지역에서 생산하는 러그마크 인증 카펫 200만 장이 유럽 등에 수출되기도 했다. ‘생산자에게는 희망을, 구매자에게는 기쁨을’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운영하는 공정 무역 중 하나인 ‘아름다운 커피’도 틈새를 노린 경우다.
‘1만명을 고용한 기업을 한 개 유치하기는 어려워도 한 명을 고용한 1만 개 기업을 유치하기는 쉽다.’ 일본 도쿄 인근에 있는 미타카 시가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해 내건 슬로건이다. 미타카이즘이야말로 정부와 기업 민간단체가 손을 잡고 지역도 살리면서, 사람도, 기업도 살리는 대안이다. 나에게는 꿈이 하나 있다. 대한민국 헌법을 뜯어고치자. 헌법을 개정하되, 1조1항을 ‘모든 대한민국 국민은 소기업 사장이 될 수 있다’로 바꾸자.”
“한국 근현대사, 그중에서도 특히 현대사는 사실 자체가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너무나 많다. 그래서 어떤 이데올로기나 이론을 앞세워 설명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본다. 사실 규명이 먼저다. 그러나 우리 사회과학자들은 실증을 너무 등한시한다. 사실 우리나라는 늘 위기였다. 그렇지만 그런 위기의식이 더욱 강하게 느껴지는 시기도 있는데, 특히 요즘 역사학계는 그 어느 분야보다 크게 다가오지 않나 싶다. 근현대사 교과서 개편 논란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역사 인식, 남북 관계 등 많은 분야에서 뭔가 비틀어지는 사태를 맞이하고 있다. 우리 사회가 ‘역류’하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왜 이렇게 됐나 살펴보면, 진보든 보수든 자기 자신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 자양분이 너무 삭막하기 때문인 듯하다. 자기를 교육하고, 교양을 닦게 하는 기반이 참 얇다. 특히 보수세력은 ‘잃어버렸다’고 주장하는 지난 10∼20년 동안 자기 반성은 전혀 하지 않은 것 같다. 1950∼1960년대 때 그 모습 그대로다. 보수가 아니라 수구냉전 세력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뉴라이트 역사관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2003~2004년경이다. 그러나 안병직·이영훈 교수 등 핵심 인사들이 그런 주장을 펼친 지는 20여 년 정도 된다. 일본에서는 1990년대부터 근대화·개발론의 관점에서 자신들이 이웃나라에 해만 끼친 게 아니라 발전에 기여했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의 논란은 역사 교과서를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데, 뉴라이트의 역사관은 일본의 자유주의 사관을 주장하는 학자나 대다수 정치인의 그것과 상당히 비슷한 점이 있다. 엘리트를 중심으로 역사를 보는 것이나, 대일본제국, 이승만·박정희 시대를 ‘자학 사관’으로 봐서는 안 된다고 보는 점에는 분명 유사성이 있다. 이래서 ‘일본의 극우 사관과 공통점이 많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이다.
가장 논란의 초점이 되는 부분은 해방 전후 시기다. 지난해에도 ‘건국절’ ‘광복절’을 놓고 크게 논쟁이 일었다. 그때 상당수 독립운동 관련 단체가 정부 행사에 불참하기도 했는데, 이는 해방 직후 상황과 비슷하다. 당시에도 좌우가 서로 장소를 따로 잡아 집회를 열었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기념해야 할 날인데 그런 식으로 보냈다. 참 슬프고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왜 해방 전후 시기가 논란이 될까. 그 역사적 연원을 살펴보면, 뉴라이트와 보수세력은 해방 직후 싸움의 연장선에서 자기가 전위 역할을 하고 있다는 소명 의식이 있는 것 같다. 당시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5·10 선거를 둘러싸고 갈등이 심했다. 김구·김규식 등을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 세력은 통일 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승만과 한민당은 단독정부 수립에 나섰다. 이 대립은 지금까지 ‘살아 있는 역사’로서 여전히 현재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1990년대 말 진행된 과거사 청산도 보수세력을 상당히 자극했다. 친일파 문제가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2000년 6·15 공동선언에도 낭패감이 들었을 것이다. 이런 위기감이 그들을 역사 투쟁에 나서게 하고 있다.
하지만 희망을 포기할 수는 없다. 한국 사회는 변할 때는 또 확실하게 변하는 게 있다. 이승만 정권 때 많은 한국인이 ‘나만 살겠다’는 의식으로 조용히 살았지만 결국 학생들을 중심으로 4월혁명을 일으켜 나라를 살렸다. 마찬가지로 지역주의 등 망국적 선거를 비판하는 사람이 많지만 또 그것 때문에 한국 사회가 변화의 힘을 갖게 되는 부분도 있었다. 요즘은 젊은 세대의 이기심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많지만 지난해 ‘촛불’이 있지 않았는가.”
- 우리는 어떻게 좋은 삶을 살 것인가
-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나와 내가 아닌 것의 경계를 묻는다
- 세계 공황의 위기 속에서 한국 경제가 갈 길은 어디인가
- 상상력은 어떻게 해서 생기나?
- 위기의 경제, 위기의 사회. 그 대안과 해법을 상상한다
- 역사는 후퇴하지 않는다. 때로 에돌아갈 뿐이다
1959년에 태어났다. 1982년 <시운동>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생태적 상상력’의 시인으로 김달진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있다.
1968년에 태어났다. 1998년 대한민국 최초의 인터넷 매체 <딴지일보>를 만들었다. <딴지일보> 종신 총수로 전방위 촌철살인을 난사하여 21세기 명랑사회 구현에 지대하게 공헌했다고 주장하는 자칭 본능주의자다.
1947년에 태어났다. 영남대학교 영문학과 교수를 지냈고, 1991년에 격월간 <녹색평론>을 창간했다. <녹색평론>은 그 어떤 매체보다 한국의 생태, 환경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63년에 태어났다. 정신과 전문의로 예리한 심리분석과 함께 사회적 통찰이 깃든 정교한 글쓰기를 하는 칼럼니스트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현재 정신건강 컨설팅 기업 ‘마인드프리즘’을 운영하고 있다.
1960년에 태어났다. 오랫동안 방송 진행자로 활동했다. 참여정부에서 국민경제 비서관을 지냈고, 성공회대학교 NGO대학원 겸임교수로 있다. 현재는 칼라TV 대표를 맡고 있다.
1968년에 태어났다. 프랑스에서 경제학을 공부했고, UN기후변화협약의 정책분과 의장을 맡는 등 유럽에서 오랫동안 활동했다. <88만원세대> <촌놈들의 제국주의> 등 활발한 저술 활동을 벌이고 있는 소장학자다.
1942년에 태어났다.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가 된 이후 20여 년 동안 마르크스경제학을 가르치다가 2008년 2월에 정년퇴임했다. 한국 정치경제학의 태두로 불린다. 현재는 성공회대학교 석좌교수로 있다.
1948년에 태어났다.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또 하나의 문화’ ‘하자센터’에서 활동하면서 여성문화와 청소년문화에 대한 실천적 담론을 생산해왔다. 지금은 모든 세대가 어우러지는 공동체 마을을 만드는 일에 관심을 두고 있다.
1961년에 태어났다. 경실련에서 시민운동을 시작했고, 함께하는 시민행동에서 사무처장을 역임했다. 대표적인 시민운동가 2세대로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
1955년에 태어났다. 한국 정치를 연구하는 정치학자로 한국정치연구회 회장, 학술단체협의회 운영위원장을 역임했다. 현재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로 있다.
1956년에 태어났다. 참여연대 사무처장과 아름다운 재단 상임이사를 거쳐 현재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를 맡고 있다. 시민운동가 1세대로 한국 시민운동의 대부로 불린다.
1948년에 태어났다. 한국 근.현대사 연구의 권위자로 역사문제연구소 소장과 <역사비평> 편집주간을 역임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있다.